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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통 '형제독립' 지켰다…구본준, 계열분리로 LG 완전히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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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견수호이 작성일21-12-14 13:54 조회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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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 LX홀딩스 회장, LG 지분 4.18% 매각매각 대금으로 구광모 LG 회장 LX 지분 확보구광모 LG 회장(왼쪽)과 구본준 LX홀딩스 회장. [사진 제공 = LG] 구본준 LX홀딩스 회장이 남아 있는 LG 지분을 정리해 계열분리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 이번 지분정리로 8개월가량 이어졌던 한 지붕 두 그룹 체제가 끝났다.구본준 회장은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셋째 아들이자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동생이다. 현재 LG그룹을 이끌고 있는 구광모 LG 회장의 작은 아버지이기도 하다.◆LG LX, 상호 보유 주식 정리…계열분리 요건 충족[자료 제공 = LG] 14일 LG에 따르면 이날 구본준 회장은 보유 중인 ㈜LG 지분 4.18%를 시간외매매(블록딜)로 외부에 매각했다. 이 매각 금액으로 구본준 회장은 구광모 회장과 특수관계인 9인이 보유 중인 LX홀딩스 지분 32.32%를 장외거래를 통해 매수했다. 이 거래는 세법상 특수관계인 간 경영권 이전 거래에 해당돼 20% 할증된 가격으로 거래됐으며 거래대금은 약 3000억원이다.이번 거래를 통해 구본준 회장은 LX홀딩스의 지분 총 40.04%(기존 지분 7.72% 포함)를 확보해 LX홀딩스의 최대 주주가 됐다. 이로써 LX그룹 독립 경영 기반도 갖추게 됐다. 구본준 회장의 LG 보유 지분은 종전 7.72%에서 2.04%로 줄어들게 됐다. 구본준 회장 일가가 보유한 LG 주식의 지분까지 모두 합하면 2.96%로 공정거래법상의 계열분리 기준인 동일인 관련자 지분 3% 미만을 충족하게 됐다.구광모 회장 및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LG 지분은 기존 45.88%에서 41.7%로 소폭 낮아졌다. 다만 여전히 안정적인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LG그룹 측의 설명이다. .구본준 회장은 이번 매각 과정에서 ㈜LG 지분 1.5%를 LG연암문화재단, LG상록재단, LG복지재단 등 3개의 LG공익법인에 나눠 기부하기도 했다.두 그룹은 향후 공정거래위원회에 계열분리를 신청할 예정이며, 내년 상반기에는 계열분리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LG 70년 전통 형제독립 원칙 때문 2017년 9월 고 구본무 LG 회장이 LG사이언스파크 마무리 건설 현장을 점검하는 모습. [사진 제공 = LG] 구본준 회장이 이 같은 계열분리를 추진하는 이유는 그룹 전통인 '장자승계' '형제독립' 원칙 때문이다.가족 간 경영권 다툼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승계 대상을 '장자'로 기정하고 계열분리를 통한 투명한 지배구조를 확립했다. 이 강력한 원칙은 LG의 순조로운 경영권 승계를 이끌어 온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LG는 장자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면 다른 형제들은 각자 독립해 별도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구인회 LG 창업주 동생 구철회 명예회장 자손들이 1999년 LG화재를 만들어 그룹에서 독립시킨 뒤 LIG그룹을 만들었고, 2대 구자경 회장 동생 구자학 회장이 LG유통(현 GS리테일)의 FS사업부를 분리해 아워홈으로 독립했다. LG그룹의 전선·금속 부문과 에너지·유통·건설 부문을 분리해 LS그룹과 GS그룹을 탄생시킨 것도 마찬가지다.이에 따라 2018년 5월 구본무 LG 회장이 별세하고 구광모 회장이 LG 대표이사에 선임되자 당시 부회장이던 구본준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즉각 물러나 연말인사에서 퇴임한다는 뜻을 밝혔다. 아울러 70년이 넘는 역사 속 LG는 다른 재벌기업들과 달리 경영권 분쟁이 없었던 이유도 이 같은 그룹 전통인 때문이라 재계는 입을 모은다.LG 관계자는 "LG는 70여년 동안 기업을 운영해 오며 단 한 번의 경영권 분쟁 없이 계열분리를 해오고 있으며 이번에도 아름다운 이별의 전통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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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상〉기자 6명의 기록 모은 취재수첩… 시민 16명의 일기 모은 ‘오월일기’현장기록으로 당시의 상황 묘사… 청문회서 진실 밝히는 데 한몫5·18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5월 12일부터 5월 25일까지 2주일간 광주와 전남 목포에서 5·18 상황을 취재해 기록한 최건 전 동아일보 기자.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으로 우리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로 도약시킨 역사적 전환점이다. 5월 그날의 현장에서 주부, 학생, 직장인, 기자 등이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 시민일기, 취재수첩으로 남겼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각종 5·18기록물 190만 점은 2011년 5월 25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올해에는 신군부의 핵심인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5·18에 대한 진실 규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5·18기록물에 대한 중요성은 다시 커지고 있다. 5·18기록물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며 5월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진실을 규명하는 단초가 되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을 맞은 5·18기록물 중 시민일기와 취재수첩에 담긴 그날의 기록을 3회에 걸쳐 싣는다. “고 문익환 목사는 5·18민주화운동의 씨앗입니다.” 최건 전 동아일보 기자(81)는 13일 5·18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남 순천 출신인 최 전 기자는 고려대를 졸업한 뒤 1967년부터 동아일보 목포담당 기자로 활동했다.최 전 기자는 1980년 5월 10일경 고 문익환 목사(1918∼1994)가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씨(1953∼1982)를 만나는 과정을 취재해 기록했다. 문 목사는 평생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한 사회운동가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 씨는 5·18 직전까지 광주 시민들의 투쟁을 주도하다가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자 도피했다. 박 씨는 1982년 경찰에 체포된 뒤 교도소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가 숨졌다. 문 목사는 당시 박 씨를 광주에서 만나 신군부 등장 등 민주화운동 방향을 논의하려 했으나 만남이 이뤄지지 않았다. 문 목사는 목포로 내려가 목포사범학교(목포대 전신) 학생들을 만나 시국 상황을 공유했고, 이후 서울로 상경하던 길에 광주에서 박 씨를 은밀하게 만나 긴박했던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최 전 기자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극비리에 이뤄졌고 5·18민주화운동의 한 씨앗이 됐다”며 “1980년 5월 12일 목포에서 ‘전두환은 물러나라’는 첫 시위가 시작된 것도 문 목사 방문이 작용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80년 5월 12일부터 2주일 동안 5·18 상황을 취재수첩에 기록했다. 5월 26일부터 광주가 심각하게 고립돼 전남 지역에서 광주로 진입할 수 없었다.최 전 기자는 5·18 이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 1987년 6·29민주화선언으로 동아일보에 복직해 1994년 퇴직했다. 최 전 기자는 “5·18 당시 진실을 취재수첩을 통해 전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광주 동구 금남로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2층 상설전시실에는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2014년 작고)의 취재수첩 3권이 전시돼 있다. 김 전 기자는 1988년 ‘10일간의 취재수첩’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원고지에 쓴 초고도 함께 전시돼 있다. 김 전 기자는 1989년 국회 광주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 그는 5·18 당시 열흘 동안 계속된 시민 학살의 현장을 건물이나 으슥한 골목길에 숨어 꼼꼼히 수첩에 기록했다. 1996년에는 ‘실록 5·18광주민중항쟁’을 펴냈다. 그의 취재수첩은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폭력 작전을 계획했다는 것을 입증하며 5월 진실을 밝히는 근거가 됐다. 정병흠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팀장은 “김영택 기자가 취재수첩을 바탕으로 쓴 책자와 실록은 5·18 진실 규명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주부, 학생, 직장인, 공무원 등 16명의 일기를 모아 ‘오월일기’(319쪽)로, 기자 6명의 취재수첩을 모아 ‘오월취재수첩’(318쪽·사진)으로 발간했다. 오월취재수첩에 수록된 취재수첩은 동아일보 최 기자와 김 기자, 전남일보 나의갑, 중앙일보 장재열, 조선일보 조광흠, 한국일보 조성호 기자의 기록이다. 취재수첩은 보도통제를 당하고 있던 언론과 달리 기자들이 쓴 현장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홍인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연구실장은 “오월취재수첩은 단순하게 자료를 엮지 않고 검증과 해제를 병행해 기록물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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