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억 땅 기부…사는 집까지 내놓은 가야금 명인의 바람

이영희 명인. [사진 문화재청]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이영희(84) 명인이 시가 200억원 상당의 땅을 문화재청에 기부했다.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에 위치한 5474㎡(1656평) 규모의 토지로, 현재 이 명인의 집과 텃밭이 있는 곳이다.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공간으로 활용해달라”는 명인의 뜻에 따라 문화재청은 2027년까지 지하 2층, 지상4층 규모의 국가무형문화재 예능전수교육관을 건립할 계획이다.지난 16일 기부채납 토지 내 자택에서 만난 이 명인은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라며 “내 삶의 마지막 정리”라고 말했다. 그가 전통예술 전승을 위해 흔쾌히 내놓은 땅은 청계산 아래 그림 같은 풍광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부근에선 판교 제2테크노벨리 조성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무형문화재 중 음악과 무용 등 예능 부문 보유자들이 체험ㆍ교육장으로 활용할 공간이 부족했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은 기능 부문 보유자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다. 예능 보유자들이 마땅한 공간이 없어 주로 자신의 집에서 전승 교육을 하는데, 집에서 가르치기엔 어려움이 많다.”노래와 춤, 악기 연주 등 예능 교육은 소음ㆍ진동 문제가 불거질 우려가 크다. 서울 반포의 아파트에 살던 그가 1990년대 말 한적한 금토동으로 이사한 것도 교육 공간 확보를 위해서였다. 당시 집을 지어 이사한 곳은 판교 제2테크노밸리 부지로 수용됐고, 이번에 기부한 땅은 그 토지보상비를 받아 2015년 구입했다. 그는 “원래 안동권씨 종갓집이 있었던 곳으로,‘궁안리’로 불렸던 명당자리”라고 소개하며 “이곳에서 보유자들이 맘 놓고 전승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193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이 명인은 예인 집안 출신이 아니었지만, 주변 예인들을 찾아다니며 교육을 받아 ‘인간문화재’의 반열에 올랐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군산의 명기(名妓) 김향초에게 승무ㆍ살풀이 등을 배운 게 시작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깨인 분이었다. 하고 싶다는 건 다 시켜주셨다. 승무를 배우고 싶다고 하니 장삼부터 직접 만들어주셨다”고 회고했다. 이후 군산의 풍류객 이덕열에게 가야금과 단소ㆍ양금 등을, 가야금 명인 이운조에게 산조를 배웠다.1958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가야금을 계속 배우고 싶었다. 당시 국악과가 있었던 덕성여대를 찾아가 가야금산조 배울 방법을 물으니, 국립국악원 사범이었던 김윤덕(1918∼1978) 명인을 소개해줬다. 그는 가야금 외에도 여러 국악기를 골고루 다뤘다. 1960년 한일섭 문하에서 아쟁을 사사했고, 대학교 4학년 때인 1961년 전국신인방송국국악경연대회에 아쟁으로 출전해 1위 장관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국악예술학교 초대 교장 박헌봉의 권유로 1962년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 교사로 취업하면서, 그는 예술세계는 폭발적으로 확장됐다.이영희 명인이 서울 금토동 자택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명인은 매주 일요일 교육이 이뤄지는 이 곳 토지를 문화재청에 기부했다. [사진 문화재청]1960년 설립된 국악예술학교에는 성금연(가야금)ㆍ한영숙(무용)ㆍ지영희(해금)ㆍ신쾌동(거문고)ㆍ박귀희(판소리) 등 명인ㆍ명창 50여 명이 교사로 포진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인 김윤덕 명인도 교사 중 한 명이었다. 이 명인은 1962년부터 1980년까지 그곳 교사로 재직하며 방과 후엔 당대 기라성 같은 예인들에게 개인 레슨을 받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그분들 사이에 휩싸여 살면서 용광로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1991년 김윤덕 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인정된 그는 국악 행정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박귀희 선생님, 김소희 선생님 등 선생님들이 ‘우리는 공부를 못해서 서러운 세상을 살았다. 고등교육을 받은 너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국악계를 이끄는 큰 동량이 되라’고 하셨다.” 그런 후원에 힘입어 이 명인은 2000년부터 12년 동안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초ㆍ중학교에 국악 전공자들을 시간강사로 파견하는 ‘강사풀제’와 해외 입양인 국악 교육 등을 이뤄냈다.평생 독신으로 살며 예인 외길을 걸어온 그는 “2000년대 이후 국악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국악과를 폐지하는 대학도 늘어난다”며 안타까워했다. “피아노 등 서양악기와 달리 하나의 음이 여러 음이 되는 게 가야금의 매력”이라는 그는 다음 세대에 그 멋을 전하기 위해 진작부터 사재를 헐어쓰고 있다. 2018년부터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을 대주고, 가야금 교육을 희망하는 용인ㆍ성남 지역 초ㆍ중학교에는 강사료 지원을 해준다. 가야금을 좋아하는 데 악기가 없어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악기 대여도 한다. 지금까지 70여개의 악기를 빌려줬다. 이제 사는 집까지 기부하기로 결정하면서 “부자는 아니지만 그 정도 감당할 능력은 된다. 이제 갈 날이 머지않았으니 마음이 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19일 기부채납 기념식을 열고 기부 부지에 대한 향후 활용 계획을 밝혔다. 문화재보호기금 약 200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8246㎡ 규모의 전수관을 짓고, 체험·교육 공간과 공연장·사무실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사무실 건물 한 층에 이 명인이 거처할 공간을 할애해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할 방침이다.